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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밤에 눈이 내렸나보다. 소복하게도 아니고 수북하게.

 

 가장 먼저 깬 아처는 거실로 나가던 중 창밖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답지 않게 성급하게 계단을 내려가 마당으로 나갔다. 

처음 창 너머를 얼핏 보았을 때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마당으로 나와서 다시 보아도 풍경은 그대로였다.

 온 세상이 백색이었다. 나뭇가지에 눈꽃이 앉아 있었다. 담장에도 눈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인도와 도로는 누군가 치워 그래도 바닥이 보였지만 갓길에 쌓인 눈은 어젯밤 폭설이 왔음을 짐작하게 했다.

 아처는 마당에 다시 시선을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아처는 눈대중으로 얼마나 쌓였는지 재 보았다. 

어림 잡아 보아도 최소 제 발목은 가뿐히 잠길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 지도 모른다. 

서번트라 할지라도 수육한 몸으로는 이 눈밭을 헤치고 지나가기 힘들다. 

아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할 일을 전부 제쳐두고 종일 눈만 치우다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을 하나 꼽자고 하면, 토오사카 가에 지금 개 한 마리가 있다는 것 정도일까.

 “우왓, 이거 왜 이렇게 많이 쌓였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랜서가 하품을 하며 걸어오다 쌓인 눈을 보고 기겁을 했다. 어젯밤에 술 취해서 토오사카 저택 문앞에서 난동을 부릴 뻔한 걸 집에 데려와 재운 걸 선견지명이라 해야 하나. 아처는 툴툴거리는 랜서를 보고 심란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일랜드에도 눈은 오지 않냐고 묻자 랜서가 난색을 표했다. 오기야 오지, 그렇지만 이렇게 많이 오지 않는다고. 랜서가 손사래를 쳤다.

 “그래, 자다 일어난 사람에게 정말로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네놈에게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지. 협조 좀 해 줘야 할 거다.”

 해야 할 일이라니. 랜서가 숙취로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저것 말이다. 아처는 고갯짓으로 마당을 가리켰다. 단번에 무슨 뜻인지 이해한 랜서가 파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랜서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나 보고 저 산더미처럼 쌓인 눈을 치우라고?”

 “누가 너 보고 혼자 치우라고 했나. 당연히 둘이서다.”

 “무리야. 나 진짜 무리. 못한다고. 저걸 하루 내내 치우자는 거냐?”

당연히 치워야 하지 않겠냐. 아처는 그럼 저걸 그대로 둘 거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마치 쓰레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처는 차가운 얼굴로 랜서에게 일갈했다.

 “적어도 난동 막아주고 재워준 값은 해야 되겠는데. 싫다면 뭐 이대로 들어서 저 눈에 거꾸로 처박아 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아, 네 알겠습니다 치우겠습니다 열심히 눈 치우겠습니다!”

 랜서가 소리를 질렀다. 말을 잘 듣는 개로군. 아처가 악랄하게 웃었다. 또 개라고 불렀다고 화를 내기도 전에 아처가 빠르게 손에 삽을 쥐어주었다. 그럼 일을 한 번 해 볼까. 아처가 삽을 어깨에 매고 앞장 서 나갔다.

 

 눈대중으로 잰 것보다 눈이 많이 쌓인 모양이었다. 한 발 내딛자마자 그대로 무릎까지 잠기고 말았다. 둘 다 190에 이르는 장신인데도 눈에 발을 내딛자 순간 휘청하고 균형을 잡지 못했다.

 랜서와 아처는 당황했다. 눈이 너무 높게 쌓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이래서 해 지기 전에 다 치울 수 있겠냐. 랜서가 눈빛에 의문을 담아 아처를 노려보았다. 아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삽을 바로 앞에 쌓인 눈에 박아 넣었다. 눈에서 삽이 파묻혔다. 아처는 그대로 힘을 주어 눈을 파냈다. 눈 한 뭉텅이가 들려 나왔다. 아처는 그것을 제 옆으로 치워버리고 계속 아래로 파내려갔다. 랜서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아처를 따라 눈 치우기에 몰입했다.

 10분이 지난 뒤에야 남자 하나가 간신히 움직일 만큼의 공간이 생겼다. 그럼 이제 길을 내 보지. 아처는 어깨를 한 번 움직이고 다시 삽질을 시작했다.

 서번트가 일반인보다 근력이 더 높은 건 이럴 때 좋다. 집앞에 가득히 쌓인 눈을 손수 치워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눈은 가볍지만 한데 뭉치면 더 무겁고 단단해져 처리하기가 곤란해진다. 저렇게 단단하게 굳은 채 시간이 지나면 얼음이 되어 위험하기도 하다. 저렇게 되기 전에 치운다 해도 눈덩이를 순전히 근력만으로 치워 낸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처럼 하룻밤만에 남자의 다리가 묻힐 정도로 가득 쌓이고, 아침 체감온다고 영하 20도까지 떨어진 한겨울 아침이라면 더더욱.

 서번트의 근력과 민첩, 그리고 영웅의 깡이 합쳐저 눈 치우기는 꽤 빠르게 진전되었다. 한 시간 정도 눈을 삽으로 파내는 단순노동을 반복하니 꽤 넓은 길이 만들어졌다.

 이제 쉴래. 랜서가 땅에 삽을 꽂고 손잡이에 턱을 괴었다. 그는 상당히 지쳐 있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눈을 치우는 게 체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었으니까. 조금 쉬는 시간을 줄 법도 한데 아처는 고개를 젓고는 다시 삽을 놀렸다. 다시 눈이 오기 전에 많이 치워 놓아야 했다. 지금 한 것은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하늘이 흐린 빛인데다가 구름이 꾸물꾸물 모여드는 걸 보아하니 머지 않아 또 한바탕 쏟을 기세였다. 아처는 삽을 움직이며 랜서를 달랬다.

 “절반 정도 치우면 코코아 타주마.”

 “절바아아안? 이것도 많이 치운 건데!”

 랜서가 항의하며 지금까지 치운 마당을 훑어보았다. 확실히 이제 땅이 보이는 부분이 그럭저럭 많아진 참이었으나 아처는 그 정도로 성이 차지 않았다. 아처는 고개를 저었다. 눈이 더 올 것 같다. 빨리 치워야 한다. 그 말만 남기고 묵묵하게 삽을 움직이는 아처를 보고 랜서는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덜 성실하게 살아도 될 텐데 왜 저러나 몰라. 랜서는 혀를 차고는 따라 삽을 움직였다.

 “그런데 왜 눈이 오기 전에 치워야 하는데.”

 “눈이 많이 오는 지방에서 살았으면서 그것도 모르나. 눈이 여기에서 더 쌓이면 압축되고 단단해져서 치우는 게 아예 불가능할 정도로 얼음이 되어버린다. 그때는 삽도 소용이 없어. 이대로 고립되고 싶다면 그래도 된다만.”

 아처가 불퉁한 목소리로 답하자 랜서는 그게 문제였냐며 해맑게 웃더니, 기겁할 만한 말을 꺼냈다.

 “뭐야, 그러면 얼음이 되었을 때 룬 마술로 불을 내서 녹여버리면 되겠네. 간단한 문제잖아?”

 당연하게도 그 제안은 아처에 의해 기각당했다. 아처의 싸늘한 눈빛과 고대인이라 앞뒤 생각 없고 멍청하냐는 잔소리는 덤이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랬으나 아처의 기우는 맞아 떨어져 삽질을 재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작은 눈송이가 떨어졌다. 결정이 큰 함박눈이었다. 엇, 눈이다. 마치 눈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랜서가 천진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체온에 차가운 눈이 닿자 눈송이는 금방 녹아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약한 게 그렇게 강해진다니 신기하네. 랜서는 괜히 신기하다고 중얼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떨어지던 것들이 제법 많아져 도로 땅을 하얗게 덮으려고 했다. 같이 눈에 홀려 있던 아처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호통을 쳤다. 서둘러라! 이대로면 우리가 눈에 묻혀 죽을 거다. 랜서도 정신을 차리고 제 앞에 쌓인 눈을 삽으로 파냈다.

 서번트라 할지라도 눈이 내리는 상황에서 중노동 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처는 저와 랜서의 상태를 살피고는 이대로는 무리일 것 같다고 판단했다. 아처는 처음으로 쉬지 않고 놀리던 삽을 내려놓았다. 랜서, 잠시 쉬다 다시 하도록 하지. 네가 말한 대로 다시 눈이 쌓이면? 킬킬거리며 장난스럽게 묻자 아처가 씩 웃었다. 냉동 개가 되고 싶다면 그래도 되고. 랜서가 하악질을 하듯 째려보아도 아처는 느물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때마침 잠에서 깨지 못하고 뒤척이던 린이 어기적거리며 나오더니 비명을 질렀다.

 “잠시만, 뭐야?! 이거 다 눈? 진짜 눈이야? 왜 이렇게 많이 쌓였어! 잠깐, 이거 설마 또 눈 오는 거야?! 미쳤어? 아처, 랜서! 빨리 들어와! 안 그러면 령주로 강제하겠어!”

 내 마스터가 그렇다는데. 아처가 윙크하며 웃었다. 랜서도 파하, 웃으며 그제야 집안으로 들어갔다. 춥다 추워, 랜서가 연신 춥다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털었다. 복도 바닥에 눈이 녹아 생긴 물이 떨어졌다. 아처가 털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기도 전에 린이 또 고함을 질렀다.

 “뭐야 너네들! 완전 얼굴이 빨갛잖아! 서번트라도 너네 수육한 몸이거든! 동상 걸리면 어쩌려고 했어! 둘 다 나란히 지금 당장 갈아 입을 옷 들고 욕실 들어가! 따끈하게 몸 녹이기 전에 나오면 간드 쏘아버릴 줄 알아! 얌전히 들어가 있어! 코코아는 내가 타올게.”

우다다 쏟아지는 잔소리에 랜서는 마스터나 서번트나, 라고 생각해버렸다. 물론 취향이라면 아가씨 쪽이지만. 랜서는 옷가지를 챙겨 아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은 욕조에 같이 앉게 되었다. 오랜만에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그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랜서는 어느 새 노곤하게 풀어져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반대로 아처는 그와 욕실을 함께 쓰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뚱한 눈으로 랜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따가워 랜서가 눈을 뜨고 물었다. 이번에는 또 뭐가 불만이냐, 궁병.

 “네놈이랑 같은 욕조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게 성에 안 차서 그런다.”

 “또 또 속 좁은 소리 하기는. 살면서 이럴 수도 있는 거지. 쩨쩨하게 살면 안 된다.”

 아처는 샐쭉해져서 양손으로 물을 담아 랜서에게 뿌렸다. 따뜻한 물을 얼굴에 정면으로 받고 랜서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소심한 복수가 통해 마음에 들었는지 아처가 짓궂게 웃었다. 저 너구리가 진짜! 랜서가 씩씩거리면서 물을 한가득 양손에 떠서 똑같이 아처 얼굴에 뿌렸다. 아처도 똑같이 기습에 놀라 머리를 세차게 털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지런히 뒤로 넘겼던 앞머리가 축축하게 이마에 닿아 풀어졌다. 확실히 머리 내리면 어려 보이네. 랜서가 쓸데없는 감상에 빠져 있는 사이 아처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아이처럼 유치하게 물놀이를 하는 게 뭐냐 랜서!”

 “완전 어이없네 그렇게 치면 먼저 시작한 건 너거든!”

 그렇게 시작한 말싸움은 결국 물놀이로 번졌다. 아예 바가지까지 들고 서로에게 물을 뿌려대는 통에 바닥이 물바다가 된 수준이었다.

 린이 바깥에서 코코아 다 되었으니 나오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제 나갈까. 따끈하게 데워진 몸이 나른해 금방이라도 고양이처럼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며 쓰러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랜서는 먼저 옷을 챙겨 입고 - 아처가 머리 좀 말리라고 잔소리를 또 했지만 랜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 나가 린에게서 담요 두 개를 받았다. 담요를 받고 랜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싱긋 웃었다. 파란 체크무늬 하나와 빨간 체크무늬 하나. 크, 아가씨 센스 하나 죽여주네. 랜서는 감탄하고 빨간 담요를 아처에게 건네주었다. 머리를 그 새 다시 세운 아처가 담요를 받아들고 린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난로가 공기를 따뜻하게 데웠다. 위에서 잘 구워지던 귤 두 개를 쥐고 랜서가 흥얼거리며 코타츠 안으로 쏙 들어갔다. 뜨거워 움찔거리면서도 귤을 까 입에 쏙 넣는 랜서는 정말 행복해하는 강아지 같아 아처는 그만 희미하게 웃었다.

 

 살 것 같다아. 코타츠에 사로잡힌 랜서가 흐물거리며 말꼬리를 늘렸다. 아처는 맞은편에 앉아 같이 귤을 까먹었다. 노릇하게 익어 단맛만 남은 게 마음에 들었다. 타이밍 좋게 린이 코코아를 가져왔다. 마시멜로까지 동동 띄운 코코아는 그야말로 겨울에 안성맞춤이었다. 랜서는 양손으로 코코아 잔을 잡고 호로록 마셨다. 코코아가 너무 단 거 아닌가. 아처는 투덜거리면서도 마음에 들었는지 그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얌전히 마셨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따끈해진 두 사람은 코타츠와 난로로 몸을 녹이고, 집안은 포근하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한 어느 겨울 날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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